가끔 쓸 데 없다면 쓸 데 없는 것들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남극과 북극에 각각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은 누구일까, 최초로 히말라야에 올라가 볼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반도 땅에 맨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누구일까, 처음으로 벼라는 잡초를 식량으로 재배해서 먹을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맨 먼저 불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최초로 글자라는 것을 만들겠다는 기발한 생각한 사람은 누구일까.....등등.
이 가운데는 '공식적인 최초'를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최초'는 정작 알려지지 않았으리라.인류의 삶과 정신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이러한 '사건'들이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비해, '최초의 이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닥 많지 않다.
쓸데 없는 호기심이 많은 내가 말레이시아에 오고 나서 이따금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낯설고 물설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기후까지 다른 나라에 최초로 발을 디딘 한국인은 누구이며, 또 이곳에서 정착할 생각을 한 최초의 한국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는 언제, 무엇 때문에 말레이시아에 발을 디뎠을까. 물론 앞으로도 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운좋게 현재 말레이시아에 생존해 있는 한국인 이민자 가운데 가장 오래 사신 분으로 추정되는 분은 만날 수 있었다. 올해 79세인 이경섭 할아버지.
그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과 결혼해서 말레이시아에서 42년째 살고 있는 영주권자이다. 그가 다닌다는 한인 교회에 딸린 작은 카페와 아담하게 잘 꾸며진 할아버지 댁 정원에서 이경섭 할아버지를 만났다.인터뷰 내용을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어떻게 말레이시아에 오시게 됐어요?
-내가 젊었을 때 건설 회사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약 42년 전에 말레이시아의 남북 고속도로 사업권을 한국에서 따냈거든요. 그때 내가 이 쪽 현장 책임자로 왔어요. 첨에 와 보니 햐, 기가 막히데. 정글 속에 덩그러니 컨테이너 하나만 있는 거라. 뭐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일도그렇고 말도 그렇고. 내가 영어도 제대로 못 했거든요.그래, 사람들이 영어보다 말레이어부터 배우라고 해서 말레이어부터 배웠어요, 무작정.
좀 들어본 영어도 아니고, 전혀 다른 말레이어가 힘들지 않았나요? 그땐 교재나 사전같은 것도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아유, 처음엔 힘들지. 근데 언어는 노력이야. 노력한 만큼 빨리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말레이어가 영어나 다른 언어보다 아주 쉬워요. 단어도 훨씬 적어서 단어만 열심히 외우면 금방이에요.
말레이시아의 말과 문화에 적응이 다 되셔서 이제는 말레이시아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텐데도 한인 교회에 다니시고 한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있나요?-말레이시아 사람들과 아무리 말이 통하더라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정"이랄까, 이런 게 없어요. 정서적으로 한국인 만한 외국인은 없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의리가 있고, 눈물도 많잖아요?그런데 교회는 한국교회들이 여기 교회에서 많이 배워야 돼요. 여기는 중국계들이 다니는 교회도 많은데 헌금같은 거 모으면 다 기부를 해요. 교회에 안 쓰고.
후유증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살갑고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으로 훌쩍 가버리면, 한동안 그렇게 가슴이 허전하면서 아플 수가 없다고.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고 나서는,이제는 이곳에 오래 정착할 만한 한국인들 몇 명들과 주로 꾸준히 교류를 한다고 한다.
현재 어떤 비자로 거주를 하고 계신가요?-나는 영주권자에요.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 가운데 영주권이 있는 사람은 서너 명밖에 안 돼요. 그 중에서는 내가 두번째로 영주권을 받았어요. 1991년이었나 92년에.
말레이시아가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잘 안 주나 봐요?-네. 말레이시아의 문제는 바로 그거예요. 백인이든 황인이든 영주권 얻기가 정말 어려워요. 부미푸트라 정책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모든 게 말레이인들 우선이에요. 심지어 이놈의 나라는 외국인들 피 빨아 먹고 살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과 결혼해서 영주권을 얻은 건가요?-아뇨. 한국인들 중에는 말레이인이나 중국계 말레이인들과 결혼한 사람들 수백 명은 돼요. 그런데도 거의 영주권은 없어요.
그럼, 어떻게 영주권을 얻게 됐나요?-10여년에 걸친 고속도로 공사가 끝나고 당시 한국의 유명 기업과 말레이시아 주정부가 합작으로 건설 회사를 설립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거기서 한국 기술자 자격으로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국 기업이 말레이시아에 기술을 전수해 주고 철수할 때, 말레이시아 측 대표가 나를 아주 좋게 봤나 봐요. 내가 다른 한국인들과 다르게 말레이시아어를 워낙 잘 하니까, 통역이 필요하다면서 3년 정도 자신들과 일을 더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그래서 한국 회사측과 제가 허락을 해서 3년을 더 그 회사에서 머물렀어요.
그런데 3년 계약 기간이 다 끝나갈 때 즈음 주정부 고급관리이기도 했던 그 현지 회사의 사장이 하루는 저를 부르더니, 혹시 말레이시아에 온 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요. 그래서 한 20년 정도 됐다니까, 영주권이 있녜요. 그래서 없다고 했죠. 그런데 자기가 영주권을 받도록 해 주겠대요. 아무리 주정부 고위관리의 말이라 해도 그땐 곧이 안 들었어요. 영주권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니까.그리고 그 회사 그만두고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이민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몇월 며칠, 이민국에 방문하라고. 무슨 일인가 하고 갔죠.
그랬더니 말레이어로 온갖 시시콜콜한 거 다 묻더니, 마지막으로 한 마디합디다. 너 말레이어 정말 잘 한다고. 나중에 들으니, 그 때 그 건설회사의 사장의 친구가 외무성 장관인데 추천서를 써 주었다고 하네요. 내가 재능있는 토목 기사에 경력이 풍부하고, 말레이어에 능통해서 말레이시아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그런 다음 외무성에서 또 연락이 와서 갔더니 장관비서가 인터뷰를 해요.그러고 며칠 있다 이민국에 오라고 해서 가니, 영주권이 나왔답니다. 그때 이민국 사람들이 축하한다면서 박수를 쳐 주는데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가슴이 막 뛰더라고요.
이경섭 할아버지는 그 때의 감격이 새삼 되살아 나는 듯 목소리가 조금 흥분되어 있었다. 한창 말레이시아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최규하 국무총리 당시 해외에서 국위선양 한 사람들에게 주는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고.
▲Pandan Indah에 있는 이경섭교민의 집 입구. 직접 조경을 해서 꾸민 정원이 멋스럽다.
지금 사모님이 중국계라고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고속도로 공사할 때, 길을 내려면 집을 밀어야 됐어요. 그런데 그 집 중에 하나가 으리으리했어요. 주석공장을 일곱 개나 가지고 있는 부잣집이었는데 가만 보니 그 집에 나이 50~60 쯤 된 중국 남자 몇이서 마작을 하고 있더라고. 내가 마작을 좀 할 줄 알거든요. 그래서 흥미가 생기잖아. 같이 했어요. 그 이후로 집 주인 남자가 같이 마작을 하자며 자주 초대를 해요. 그러다가 어느 주말이었는데, 빨간 차에서 늘씬한 아가씨 하나가 내려요. 아들 넷, 딸 여섯 중에서 넷째 딸이라고 하더라고. 첫 눈에 반해 버린 거지. (웃음)나중에 집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사실은 자신도 날 보고 첫 눈에 반했다고. 주말이라 집에 다니러 왔다가 나를 보게 된 거라고.
아내 쪽 식구들이 싫어하지 않으셨나요?-싫어하다마다. 우리 둘이 만나는 거 알고 아버지가 펄쩍 뛰었지요. 자기 딸 갖고 장난치냐고.집사람이 나이도 나보다 열 네살이나 어렸거든요.
교제를 하는 동안 언어 때문에 힘든 점은 없었나요?-그게 참 신기하대요. 말이 안 통해도 연애하는데 하나도 지장이 안 돼요. (웃음)집사람이 학교 가기 싫다고 중학교 과정까지만 해서 영어를 모르고 중국어만 해요. 여긴 학력 따위는 안 중요해요. 기술이나 능력이 더 중요하지. 암튼, 나는 말레이어는 잘하고 영어는 조금 할 줄 아는 정돈데.그래서 우리 둘이 만나면 말이 하나도 안 통해요. 그런데 연애가 돼요.
지금 결혼 생활에 만족하시나요?
-만족하다마다. 일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잠깐 나가 있었어요. 그 때 집사람은 혼자 애들 키우면서 나를 기다렸어요. 주위에서 다들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었나 봐요. 나는 나대로 그 때는 전화도 힘든 때였으니까, 중국어 잘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중국어로 집사람에게 편지를 열심히 써서 보냈지.집사람이 아직도 그 많은 편지를 하나도 안 버리고 다 가지고 있더라고.한 번은 건설 회사에서 하청업을 하는 한국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데 그 동안 남부럽지 않게 벌어 놓은 돈을 다 날렸어.차는 고사하고 차비가 없어서 먼거리를 걸어다닐 정도였어요. 그러다 한국에 있을 때 걸린 적이 있던 결핵까지 재발했어요.그 때 집사람이 밥장사를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렸어요. 그 사람도 그 때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집사람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있지도 못했어요.
말레이시아에 와서 결혼한 부인과는 슬하에 자녀가 있으신가요? 있다면 어떻게 되나요? -2남 3녀인데 아들 둘은 친자식이고, 딸 셋은 집사람 누이의 자식이야. 집사람 언니가 암으로 일찍 죽어서 그 애들을 거둬 키운 거지.
친자식만 키워내기도 쉽지 않으실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하셨어요?-내가 출근하면 집사람이 하루종일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데 안 돼 보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카들을 데려다 키우자고 하니, 좋아하대요. 그래서 내 자식같이 키웠지.
그래도 사모님의 언니 자식을, 그것도 셋씩이나,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말레이시아에는 한국처럼 이런 일들이 이상한 게 아니예요. 또 애 키우는데 돈도 많이 안들어요.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에 밥값은 또 얼마나 싸요. 여기는 한국보다 결식 아동이나 굶는 사람이 훨씬 적어요. 밥값이 싸니까. 겉이 번드르한 한국하고 비교해 봐요.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지.지금은 다들 시집을 갔는데, 커서도 딸래미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 몰라.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활짝 웃으신다. 그 웃음엔 진정으로 느긋하면서도 여유있는 만족감과 행복이 묻어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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