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원제: Simulacres et Simulation)는 미국의 영화감독 워쇼스키 형제(현재는 둘 모두 성전환수술을 해 ‘자매’가 되었다)의 작품으로, SF 영화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이 영화의 초반에 컴퓨터 해커인 주인공 네오(가상세계인 매트릭스에서의 이름은 ‘토마스 앤더슨’이다)는 자기 아파트의 노크 소리를 듣게 되는데, 문을 열자 고객 하나가 나타난다. 그러자 그는 책장으로 가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시옹』을 빼든다. 그것을 열자 책은 가짜였다. 속이 빈 것이다. 대신 그 안에는 분명 불법 소프트웨어일 것으로 보이는 디스켓들이 들어있다. 가상의 공간 매트릭스. 그리고 그 속에서 본질을 망각한 채 매트릭스라는 허상에만 집착하는 사람들. 영화 <매트릭스>는 바로 현재 우리 사회를 잠식해나가고 있는 ‘시뮬라크르’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보드리야르는 1981년 자신의 저서 『시뮬라시옹』을 통해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위험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시뮬라크르’(simulacres)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이다. 우리말로는 ‘가장’(假裝)으로 번역할 수 있다. 시뮬라크르는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며,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흉내내거나 모방할 때는 이미지란 실제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한다.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시뮬라크르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크르를 하기’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장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시옹』이 등장하는 장면(출처: cluesforum.info)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 트리니티 등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저항군을 결성해 ‘박제가 된 실제’가 실제인 세상에서 본질을 찾고자 투쟁한다. 이러한 저항군의 의지는 ‘주객이 전도’된 디스토피아가 실현되지 않도록 원 제작자와 제작물의 기본적 권리를 지켜주는 저작권의 취지와도 일견 닮아있다. 그리고 ‘미스터 앤더슨’이 되는 세상에서 ‘네오’를 지키려는 저항군처럼, 복제와 가장이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원본을 지키는 핵심 주체는 바로 유네스코이다.
저작권(copyright)은 창작물을 만든 이(저작자)가 자기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배타적인 법적 권리로, 만든 이의 권리를 보호해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저작권자는 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타인이 복제·공연·전시·방송·전송하는 등의 이용을 허가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 저작권의 내용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많은 나라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국제법은 「문학·예술적 저작물의 보호를 위한 베른 협약」(‘베른 협약’, Bern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Literary and Artistic Works)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저작권을 표시하기 위해 ©, (C) 또는 (c) 심볼을 이용한다.
저작권은 유럽에서 발달했는데, 15세기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발하면서 독자층이 확대되었다. 이는 인쇄술을 통해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하면서, 동시에 ‘원본’을 확인하고 그 가치와 권리를 보호해 줄 장치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을 의미한다. 출판이 활발했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1517년 저작권법이 만들어졌고, 영국에서는 소수에게 출판 독점권을 줬다. 1710년 영국 앤 여왕 때 저작권법이 제정되어 저작권 보호 기간이 정해졌고, 이 기간이 지나면 사회가 공유했다. 1886년 저작권에 관한 최초의 다자조약인 「베른 협약」이 체결되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개정되었다(약 20년마다 개정 작업이 이루어진다).
「베른 협약」을 기반으로 1952년, 이 협약에 참여하지 않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유네스코의 주도 하에 저작물에 관한 국제조약인 「세계 저작권 협약」(UCC, 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이 체결된다. 유네스코가 저작권 수호에 있어 적극적이었던 것은 창의성 및 관련 사업의 증진, 문화 산업의 발전과 문화다양성 보호를 위해 저작권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유네스코 조약」으로 불리는 UCC는 문학·음악·미술 및 지적인 작품을 포함한 저작물에 관해 저자와 저작권을 가진 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뒤 조약에 가맹한 국가들이 「베른 협약」에 가입하면서 「베른 협약」이 저작권과 관련해 국제사회의 기본 조약이 되었다. 1996년에는 「세계지적재산권기구 저작권 조약」(WCT, WIPO Copyright Treaty)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는 인터넷 확산에 따라 제기된 전송권과 같은 것이 저작권에 더해져 「베른 협약」을 넓혀 나갔다. 또한 1993년에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 협정(TRIPs, Agreement on Trade-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이 체결되어 지식재산권을 무역 규범으로 만들었고, 해외 저작물도 모두 보호받고 있다.
UCC 이후 유네스코는 창의 및 문화 사업 분야 내에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 증진 및 역량 강화, 관련법에 대한 정보 제공 및 훈련·연구 등에 주력함으로써 불법 복제 방지를 위해 노력해왔다. 또한 유네스코는 저작권과 관련된 대표적인 기념일인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World Book and Copyright Day, 4월 23일)을 제정했다. 유네스코는 국제출판인협회(IPA, International Publishers Association: IPA)가 스페인 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제안한 '책의 날'에 러시아 공화국이 제안한 ‘저작권’의 개념을 포함시켜, 1995년에 열린 제2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매년 4월 23일을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로 제정했다(4월 23일은 스페인 까딸루니아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던 세인트 조지의 날, 그리고 1616년 세계적 작가인 세르반데스와 세익스피어가 사망한 날에서 유래했다). 한편 저작권의 수호 외에도 유네스코는 저작권에 기반한 정보의 공유를 위한 조치인 ‘카피레프트’(copyleft)와 관련된 활동도 전개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정보’(information for all)를 촉진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위에서부터)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공식 로고, 2015년에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기념행사(출처: 유네스코)
영화 <매트릭스>에서 저항군의 행동대장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주면서 두 알약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파란 알약은 행복한 천치로서의 일상을 보장받는 열쇠로, 이것을 먹으면 황폐한 현실 세계를 발견하고 시름에 잠길 일이 없게 된다. 반면 빨간 알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네오는 고심 끝에 후자를 택하고, 상상도 못할 엄청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SNS를 포함한 첨단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무수한 복제와 모방, 전달이 발생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본질을 좇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러나 과거 없이는 현재와 미래도 존재하지 않듯이, 모든 것의 ‘시작’을 인식하고 보존하는 일은 이들의 존재적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기본적 권리이다. 그러한 점에서 저작권을 위한 유네스코의 노력은 ‘빨간 알약’ 만큼이나 가치 있고 파급력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 위키피디아, “저작권”(https://ko.wikipedia.org/wiki/저작권)
- 컬툰스토리, 『저작권 ABC로 가는 길』 (태믹스, 2014)
- 유네스코 (www.unesco.org)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4월 23일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World Book and Copyright Day)” (goo.gl/vmWsY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