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그 당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우주소년 아톰‘이, 사실은 일본 원작의 ’철완 아톰‘의 한국판 이라는 알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이나 실망감이 꽤나 컸던 기억이 난다. 어디 ’우주소년 아톰‘ 뿐이었으랴!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나 ’황금박쥐‘ ’타이거 마스크‘ 등, 방영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TV만화영화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제작된 ’일본 만화영화‘인 것을 안후의 배신감은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우던 캐릭터들이, 사실은 일본을 위해(광의로 해석하면 지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거였다니!
초등학생(그 때는 국민 학생)을 지나 중학생쯤이었을 무렵이니까 뭐 국가관이나 정체성에 혼돈을 겪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튼 어린 마음에도 꽤 충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만화 캐릭터들(예를 들어 ‘뽀로로’나 ‘방귀대장 뿡뿡이‘)이 또 다른 한류를 이끌어가고 있으니, 역지사지로 그 때의 상황을 나쁘게만 기억할 필요는 없을 법도 하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 케이블에서 다시 방영되고 있는 ‘명탐정 코난’의 주인공 ‘남 도일’이 사실은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일본 캐릭터라고 요즘의 초등학생들에게 얘기해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게 뭐 어때서요? 쯧쯧 시대에 뒤떨어진 국수주의적 마인드라니 --- 모든 걸 좀 더 글로벌한 시각으로 보세요!”
라고 핀잔을 주지 않을까 싶다. 내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의 위상에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수준이 되었으니까!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건 어린 시절의 꿈과 정의감 조국애 등을 불어넣어 주었던 만화는, 어른이 되어서 반추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우주소년 아톰’을 만나기 위해 ‘돗토리 시’에서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이동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효고 현’의 ‘다카라츠카’ 시에 ‘데츠카 오사무 기념관’이 있는데, 비유하자면 ‘범 부산’ 격인 ‘김해’ 시에 기념관이 있는 셈이라 일단 ‘오사카’에 본거지를 정하고 이동할 요량이었다.
‘오사카’ 역에서 ‘한큐 센 다카라츠카 행’을 타면 4 정거장만에 ‘다카라츠카’ 역에 닿는데, 역을 빠져나와 나무가 우거진 길을 따라 슬슬 걸어가다보면 정식명칭이 ‘다카라츠카 시립 데츠카 오사무 기념관’에 도착하게 된다.
꼭대기 층의 유리창 색깔이 알록달록 무지개 색이라서 그런지 얼핏 모스크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어릴 적 우상이었던 ‘아톰’이 살고 있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념관 입구 조금 못 미쳐는 커다란 ‘불새’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짐작하다시피 ‘데츠카 오사무’의 또 다른 대표작인 ‘불새’를 형상화해 놓은 작품이다. ‘불새’ 옆으로는 ‘아톰’ ‘’ 등 ‘데츠카 오사무’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의 핸드 풋 프린팅이 있어서, 내 손과 ‘아톰’의 손 사이즈를 가늠해 보는 등 시작부터 동심을 자극한다.
입구를 들어서서 티켓을 구입하면 기념관의 안내 팸플릿을 나눠주는데, 물론 한국어판도 있다.
입구로비에 있는 TV 모니터에서는 ‘데츠카 오사무’의 삶과 주요작품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물과 함께 귀에 익은 ‘우주소년 아톰’의 주제가가 추억 샘을 자극해 온다.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전’이나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과는 달리 사진촬영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인데, ‘아오야마 고쇼 후루사토 관’ 과 마찬가지로 작품 하나하나를 타이트 쇼트로만 찍지 않으면 큰 제재가 없다는 점은 책에 올릴 사진을 찍어야 하는 여행 작가의 입장에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입구 왼편의 첫 번째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베레모를 쓴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데츠카 오사무’의 사진이 관람객들을 반겨준다.
특정 직업군의 정형화된 이미지 중에서, ‘만화가’라는 직업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 중의 하나는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문 남자’일 것이다.
우리나라 시사만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고바우 영감’인데, 이 만화를 그린 ‘김 성환’ 화백의 당시 모습을 기억해 보면 가장 먼저 ‘베레모’를 쓴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릴 적 즐겨보던 드라마 중에 ‘한 지붕 세 가족’ 이라는 가족드라마가 있었다. ‘임 채무’ ‘임 현식’ ‘박 원숙’ 그리고 아역 ‘이 건주’ 등 개성 있는 출연진으로 인해 한때 국민드라마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는 ‘심 양홍’ 이라는 중견배우가 ‘만화가’ 역으로 나오는데, 역시나 ‘베레모’를 쓰고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나는 만화가입니다” 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베레모’를 척 쓰고 있으면 ‘만화가’나 ‘화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일본의 원조 국민그룹인 ‘스마프’의 ‘쿠사라기(한국이름 ’초난강‘)’가 ‘데츠카 오사무’의 일대기를 그린 ‘신의 베레모’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본 기억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유야무야된 것 같아 조금은 안타깝다.
(‘데츠카 오사무 기념관’의 '마에카와' 관장에게 직접 물어 보았으나 금시초문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본의 연예기자들도 낚시기사를 쓰는건지 아니면 제작비 문제 때문에 미뤄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데츠카 오사무’는 말 그대로 ‘일본 만화의 대부’라고 불린다.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리미티드 기법’ 이라는 것을 활용해서 기존의 애니메이션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깨고 세계시장에서 ‘재패니메이션’ 선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노동집약적 기법은 당시 다른 많은 만화작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선배의 작업에 무척 분개했다고 한다.
아마도 ‘앤디 워홀’이 판화작업을 통해, 그동안 진품그림은 화가가 그린 단 한 점만이 존재한다는 틀을 깬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맞을지 모르겠다.
‘데츠카 오사무’는 만화영화에서 필요한 동화(動畵)작업을 우리나라에 하청을 주었는데, 이 하청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대원동화(지금의 대원미디어)’ 같은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애니메이션 업체를 배출하기도 했다.
1층 전시실은 수십 개의 둥근 유리통 속에 전시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코주부 박사‘가 ’아톰‘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를 형상화 하였다고 한다. 만화 캐릭터들은 물론, ’데츠카 오사무‘의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던 청년시절의 모습까지 꼼꼼하게 잘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잠자리 채‘를 든 초등확교 시절의 ’데츠카 오사무‘ 어린이의 흑백사진이었다.
‘데츠카 오사무’의 한자이름이 ‘手塚 治虫’인데, 어릴 적 ‘오사무시’라는 곤충에 흠뻑 빠져서 만화가가 되었을 때 필명을 ‘오사무’라고 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데츠카 오사무’는 곤충을 무척 좋아하고 또 전문가 못지않게 조예가 깊은데, 아예 취미수준을 넘어 ‘곤충대전’ 이라는 곤충관련 전문사전을 발간할 정도였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데츠카 오사무’의 경우는 ‘곤충전문가’ 그리고 ‘미즈키 시게루’는 ‘세계 요괴편람’을 펴낼 정도의 ‘요괴전문가’ 라는 사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2층에는 주로 만화장서가 진열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펴낸 ‘데츠카 오사무’의 대표작 ‘철완 아톰(영어 제목은 ’Astro Boy'인데, 아마도 ‘우주소년 아톰’은 이 ‘아스트로 보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 과 ’정글대제(밀림의 왕자)‘ 그리고 ’불새‘ ’블랙 잭‘ 등이 서가를 빼곡 채우고 있다.
어릴 적 가장 좋아하던 ‘밀림의 왕자 레오’는 ‘정글(일본식으로 발음하면 ‘쟌구루’) 대제‘가 정식 타이틀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글대제‘ 보다는 ’밀림의 왕자 레오‘가 훨씬 더 정감 있게 들린다.
그런데, 어릴 적에 가졌던 의문점 중의 하나는, “‘밀림의 왕자‘가 레오일까? 아니면 타잔일까?” 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아적 발상의 유치찬란한 의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때는 그게 그리도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왜 그 당시의 국내 영화수입업자들은 ‘밀림의 왕자’ 타이틀을 함부로 남발했을까?
깔끔하게 ‘밀립의 왕자’는 레오! 그리고 ‘정글의 왕자’는 타잔! 이렇게 정리해 주었더라면 의문도 가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밀림’과 ‘정글’의 차이점은 또 뭐지?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흰 사자 ‘판자’는 백수의 왕이다. 어느 날 악랄한 백인 사냥꾼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고, ‘판자‘의 부인인 암사자 ‘일레이자’ 역시 사냥꾼들에게 끌려가게 된다. 임신 중이었던 ‘일레이자’는 배 위에서 아기사자 ‘레오’를 낳았고, ‘레오’를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치게 한다. 용감한 아기사자 ‘레오’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밀림의 왕자’가 되고, 인간들로부터 밀림을 지켜 나간다.
‘밀림의 왕자 레오’는 ‘엘튼 존’의 주제가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기억되는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언 킹’과 여러 면에서 판박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밀림을 지켜낸다’는 자연 보호적 시각에서 보면 ‘밀림의 왕자 레오’가 좀 더 시대를 앞서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밀림의 왕자 레오’의 한국어 판 주제가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불러 유명세를 탔던 ‘박 혜령’이라는 꼬마 가수가 불렀다.
“아프리카 밀림은 동물의 왕국
땀 흘려 지켜온 평화의 나라
여기에 용감한 밀림의 왕자
레오 레오 레오 흰 사자 레오
엄마별이 반짝인다 ---“
타잔이 치타 손을 잡은 채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설쳐도, ‘라이언 킹’이 아기 사자 ’심바‘’의 애처로운 눈동자와 ‘엘튼 존’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유혹을 해와도, 지금도 ‘밀림의 왕자’는 레오라는 내 믿음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