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흑백 TV 만화영화에 관한 정보를 모으다가 ‘명탐정 코난’의 작가 ‘아오야마 고쇼’의 고향이 돗토리 현이고 그 곳에 ‘후루사토 관’이라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더 흥미를 끌었던 건 ‘‘아오야마 고쇼’ 말고도 ‘미즈키 시게루’나 ‘타니구치 지로’ 같은 유명 일본 만화가 역시 돗토리 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돗토리 현까지는 우리나라 동해항에서 출발하는 크루즈가 현재 운행을 하고 있어서,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있었다.
물론 배 갑판위에서 보는 석양이나 일출의 느낌을 좋아하는 낭만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큰 메리트일 것이고, 반면 배 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대단한 고역이겠지만 말이다.
배라는 이동매체가 주는 느낌은 아무래도 비행기보다는 좀 더 낭만적이고 아날로그 적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것 같다.
일본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까지 꼬박 25시간을 배를 타고 이동해 보았기 때문에 동해항에서 일본의 ‘사카이 미나토’ 항까지 15시간 걸리는 장거리 배 여행이 “훗! 그쯤” 이라고 코웃음을 칠 정도로 만만하게 여겨지기도 했고, 또 유달리 배를 타고 하는 여행을 좋아했기 때문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배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붉은 돼지’에서 20세기 초반의 ‘비행정 시대’를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했는데, 지금도 나는 ‘파르코 롯소’처럼 비행정을 타고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곧잘 하곤 한다. ‘붉은 돼지’ 삽입곡인 ‘체리의 계절’의 볼륨을 한껏 높여 놓은 채로 비행정을 타고 석양 위를 날다가 해가 지면 배로 변신해서 바다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비행정을, 왜 요즘은 만들지 않는 것일까?
우리나라 동해항에서 목요일 오후 6시에 DBS 크루즈를 타면, 다음 날 아침 9시에 일본의 ‘사카이 미나토’ 항에 도착하게 된다.
DBS 크루즈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항을 출발, 우리나라 동해항을 거쳐 일본의 ‘사카이미나토’ 항에 닿는, 이른바 다국적 운항을 하는 크루즈 선이다. ‘타이타닉’이나 ‘퀸엘리자베스 2호’ 같은 초호화 크루즈는 아니지만, 그래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크루즈 여행을 즐겨보기에는 손색이 없을 정도다.
드라마 ‘전쟁의 여신 - 아테나’를 이 DBS 크루즈에서 제작협찬을 한 탓인지, 배 안 곳곳에는 주인공인 ‘정 우성’과 ‘수애’ 가 등장하는 드라마 촬영 신이 걸려 있었다.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를 운항하는 ‘아케보노’ 호에서는 따로 식사제공을 하지 않아 300엔짜리 맛없는 자판기 야키소바를 먹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DBS 크루즈는 고맙게도 저녁과 아침 두 번의 식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음식 가짓수도 다양했고 무엇보다 맛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항에서 출발한 탓인지 배 안에는 러시아 국적으로 보이는 서양 사람들이 다수 눈에 띄었는데, 요즘은 어디를 가도 중국인들 못지않게 눈에 띄는 여행객이 러시아 사람들인 것 같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밤을 달린 배는 어느덧 일본 영토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사카이 미나토’ 항은 우리나라 동해안의 풍경과 같은 듯 또 다른 듯 미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배는 항구 앞에 걸쳐져 있는 ‘돗토리’ 현과 ‘시마네’ 현을 잇는 다리 앞에서 마치 “시마네 현! 니들이 감히 독도를 너 네 현에 포함시켰지? 흥, 너 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을 테야!” 라고 하는 듯이 크게 몸을 틀어 ‘돗토리’ 현의 영토인 ‘사카이 미나토’ 항으로 곧장 진입하는데,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괜스레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내려서 셔틀버스를 타거나 부두를 따라 조금 걷다보면, 요괴열차로 유명한 ‘사카이 미나토’ 역이 나온다. ‘사카이 미나토’ 역에서 ‘요나고’ 역까지는 ‘JR 사카이 선’이 운행되는데, 요괴의 고장답게 운행열차가 ‘게게게의 기타로(우리나라에서는 ’요괴인간 타요마‘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었다)’에 나오는 4개의 캐릭터로 꾸며져 있다.
주인공인 ‘기타로’와 ‘기타로’의 아버지인 ‘메다마 오야지(눈알 아버지)’ ‘네코 무스메(고양이 소녀)’ ‘네즈미 오도코(쥐 인간)’의 그림들로 기차를 꾸며 놓았는데, 낯선 캐릭터임에도 그 섬세하고 기발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사카이 미나토’ 역에서부터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 까지는 요괴거리로 불리는 ‘미즈키 시게루 로드’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길거리 곳곳에는 100개가 훨씬 넘는 다양한 요괴 캐릭터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정서상 요괴라는 캐릭터는 다소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인데, 일본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게게게의 기타로’를 즐겨본 탓인지 다들 굉장히 이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이 ‘사카이 미나토’ 시는 ‘게게게의 기타로’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지나다니는 택시에도 ‘메다마 오야지’의 눈알이 붙어 있음은 물론 인근공항의 공식이름이 ‘요나고 기타로 국제공항’일 정도이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를 따라 걷다보면, ‘기타로’와 ‘네코 무스메’ 등 ‘게게게의 기타로’에 등장하는 캐릭터 복장을 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말 그대로 ‘능동적인 서비스’ ‘마중 나가는 서비스’를 체험하는 셈인데, 거리에서 이 캐릭터들을 만나는 일본인들은 조금 호들갑스럽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반색을 하며 좋아들 하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나도 ‘기타로’와 허그를 하게 되었는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네코 무스메(고양이 소녀)’와 마주쳤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내심 해보았다.
하지만, 이 ‘네코 무스메’도 사실은 아르바이트 남자 대학생이 여자 분장을 한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요괴라는 캐릭터가 낯설기는 하지만, TV로 방영된 오리지널 흑백 만화영화에서는 꽤 재미있는 주제가가 나온다.
“요, 괴, 요괴들이다
해 떠도 이불 속에 쿨쿨쿨
즐거워라 즐거워라
요괴들의 세상엔 학교도 필요 없어“
글쎄 학교가기 싫다고 요괴가 되려는 어린이들은 없겠지만, 아무튼 이 주제가를 듣고 난 후에는 요괴라는 캐릭터가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 전에 ‘요괴인간 벰’의 실사영화가 일본에서 개봉이 되었다고 하는데, ‘게게게의 기타로’ 역시 실사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1편에서는 ‘꽃보다 남자’의 여주인공인 ‘이노우에 마오’가 여자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2편인 ‘천년 저주의 노래’에는 놀랍게도 ‘소 지섭’이 요괴분장을 하고 특별출연을 하였다.
간지가 좔좔 흐르는 소간지 ‘소 지섭’과 요괴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아도 한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작고 미미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열심히 연기에 몰두한 것 같아 그의 프로정신에 짝짝짝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요괴거리인 ‘미즈키 시게루 로드’를 슬슬 걷다보면 어느새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에 도착하게 된다.
‘사카이 미나토’ 시 전체가 ‘게게게의 기타로’ 캐릭터들로 도배되어 있는 것에 비해, 2층으로 된 기념관은 다소 조촐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내부에는 일본의 국민 만화가인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과 기념유품들을 섬세하게 잘 배치해 놓았다.
‘미즈키 시게루’는 요괴만화 외에도 ‘요괴 대전’을 집필할 정도로 요괴 전문가인데, 한국의 장승요괴를 연구하러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즈키 시레루’는 ‘게게게의 기타로’ 4편에 한국의 장승요괴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1층 회랑에는 ‘미즈키 시게루’의 인생역정을 두루마리 그림으로 묘사한 대형 걸개가 걸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요괴 캐릭터들 보다 이 ‘인생역정 두루마리’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
‘미즈키 시레루’는 태평양전쟁에 참가한 후 남방의 한 섬에서 부대가 거의 전멸하는 비운을 겪게 되는데, 혼자 밀림을 방황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린 혼수상태에서 ‘요괴’를 보게 되었고 이 경험을 살려서 종전 후 ‘게게게의 기타로’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미즈키 시게루’의 생애에 감동을 받은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 폭발물 사고를 당해 왼 팔을 잃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한쪽 팔을 잃은 느낌을 만화 속 ‘기타로’의 한 눈 상실로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애인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는 점에서 존경받아도 마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최대치’가 버마의 밀림에서 한쪽 눈을 잃는 장면이 나오는데, 솔직히 그들처럼 불운한 시대를 살지 않음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미즈키 시게루’는 불편한 몸임에도 세계여행을 수차례 다니는 등, 여행전문가로서도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2층 전시실에는 ‘미즈키 시레루’의 여권과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반질반질 손때가 묻어 원래의 색깔인 초록색을 잘 가늠 못할 정도가 되어버린 미놀타 P’s 라는 필름 카메라가 특히나 내 눈길을 끌었다.
작은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세계여행을 하는 ‘미즈키 시게루’의 씩씩한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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