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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아한 빛을 따라서
청주, 교육도시로 알려진 단아하고 맑은 쉼표를 품었을 듯한 도시 중부 내륙에 알맞게 위치한 청주 진입로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터널이 있다. 1948년에 식재된 1500여 그루가 넘는 플라타너스는, 주문을 걸듯 오고 가는 이의 심상에 가까이, 기꺼이 여운을 남긴다. 봄에는 연두 가지마다 생긋한 발랄함이 꽃향기와 범벅이 되고, 여름엔 햇빛 받아 눈부신 초록의 향연 청량하고, 가을엔 쓰다듬는 바람에 기분 좋아 흥얼대는 황금단풍 물결 빈 마음 우려내주고, 엉터리 약속에 가슴 한켠 휑한 바람 불던 어느 겨울날에도, 새하얀 눈 코트 삼아 하얗게 부풀어 올라 시린 가슴 채워주던 가로수길. 사계절 향기를 맛깔나게 품고 오가는 이들의 편안함과 같이 물드는 길. 그 한가로운 기운을 맞으며 무심천변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면 수암골을 만날 수 있다.
수암골 – 말갛게 웃고 있는 온화한 동네
수암골 벽화 마을은 청주의 진산인 우암산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청주 지역의 손꼽히는 달동네이다.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고단 했던 삶을 풀어놓아 정착지가 된 곳으로 밤이면 가장 많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동네이다.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슬레이트 지붕과 기와, 회색빛 담벼락에 무지개가 내려앉은 건 2007년 추억의 골목 여행이란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 되면서 부터이다. 최근엔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 골목 옆구리에 도회지의 까페들이 이사를 왔다. 낡은 것과 새것의 조화가 새삼 흥미로워, 어느새 내 발걸음은 팔봉빵집 맞은편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들마루에선 가을볕에 어르신들의 주름과 감나무 열매가 노릇하다. 초롱 등불 귀걸이를 한 벽에는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코끝 빨간 호랑이가 있다. 온통 노란 꽃으로 몸단장한 이름마저 ‘꽃을 사랑한 호랑이’. 호랑이도 사랑에 빠지면 저리도 수줍게 다소곳한 모습일까?. 밭‘전(田)’자 모양의 지도대로 올라가본다. 벽화 속 술래가 뒤돌아볼까 얼른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웃는 아이 삼남매의 함박웃음에 온 동네가 환하다. 푸짐한 먹보 남매의 얼굴보다 큰 입도 재미있다. 구멍가게인 삼충상회 앞에서 신이 난 아이들. 삼충상회 아이스께끼 통속엔, 아직도 녹지 않은 아이스께끼들이 차곡히 있을 것만 같다. 형형색색 물감들은 아이들의 활짝 핀 동심에 장단 맞춰 벽에다 춤을 춘다. 밤이 되면 얼음땡에서 풀린 그림들이 쏟아져 나와 한데 어우러져 재잘 될 거 같다. 갈라지거나 깨진 허름한 담벼락에도 풀꽃은 자리를 틀고 그림은 이어졌다. 40개가 넘는 타일로 ‘꿈나무’ 글자를 만든 조각벽화, 고래와 함께 달리는 자전거 타는 아이, 추억의 연탄구이, 골목골목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솜씨자랑 벽화들은 정감어리고 향수를 자극한다.
동네엔 벽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그대로 고여 있는 골목도 있다. 걸음을 멈칫하게 만든 돌벽에 새겨진 단어 ‘꿈길‘. 얼기설기 늘어선 전선줄에 바지랑대 꽂아 만든 빨랫줄에선, 말끔히 세수한 빨래들이 살랑 바람에 그네를 탄다. 화사한 벽화에 질세라 집집마다 한아름 알록달록 화장한 화분에서는, 앞다투어 한껏 자란 싱싱한 파와 상추가 가득하다. 동네 주민들의 소박하고 평온한 풍경에 미소가 번진다. 우리네 잃어버린 시간과 세월의 흔적이 섞여 마을 전체가 작품인 수암골. 녹슨 것은 이 동네의 대문이 아니라 내 시선이 아니었는지. 헐고 세우는 일이 가벼운 세상, 늘 그 자리에 있어 충분히 어여쁜 수암골. 수암골 꼭대기가 주는 뭉글뭉글, 목화솜처럼 포근하고 따사로운 선물을 안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 다음 예정지로 향한다.
상당산성 - 멈춘 듯 흐르는 역사
우암산로를 따라 4km쯤 가면 충북 지역의 문화유산이 전시된 국립청주 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을 기점으로 명암로를 따라 가다 보면 성내로에 진입하게 된다. 그 끄트머리에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고 너른 잔디광장과 상당산성이 있다. 산성 주위에 나무들은 터진 홍시 뒤집어 쓴 듯 노을빛이거나, 전란의 피를 기억하고 있기라도 한 듯 유난히 붉다. 산성은 네모진 화강암으로 상당산의 4.2km나 되는 둘레를 감싸고 있다. 백제 때 토성으로 축성되었고 왜란을 견뎌내며 석성으로 개축이 되어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다. 동문, 서문, 남문의 3개 성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의 암문, 치성, 수구를 갖추고 있다. 주변 경관이 다채로운 산성의 산책로와 등산로는 역사의 숨결을 전해주며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정문인 남문을 시작으로 완만한 경사의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자잘한 오르내림이 간지러울 때쯤엔 중간 중간 나무 의자가 쉼터를 제공해주고 남암문을 지나 20분가량 걸으면 서문이 나온다. 서문에 서면 청명한 하늘을 지붕 삼아 그윽하게 자리 잡은 청주와 청원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암문을 거쳐 동문을 지나면 동장대가 나오는데, 햇볕 한줌 가을바람 한 모금 머금은 성곽길 들풀들의, 아무렇지도 않게 삐쭉대는 모양새가 예쁘다. 동장대엔 봄날 흐드러지게 핀 철쭉과 연산홍은 없어도 산성순례를 마친 이들이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엔 더할 나위 없다. 동장대 아래에는 홍수로 없어진 옛 수문의 자리에 개구리밥이 뚜껑처럼 뒤덮인 저수지가 있다.
산성 한 바퀴를 돌고나니 오골계와 대추술이 유명한 한옥마을과 풍미 넘치는 식당촌이 눈앞이다. 3대째 고소한 전냄새 진동하는 향토음식점으로 들어가 본다. 뜨신 순두부들이 모닥불처럼 여기저기서 모락모락 김을 낸다. 갖은 야채로 멋을 낸 고춧가루 분칠한 도토리묵과 투실투실 뽀얀 손두부에, 여행이 더 보드라워지고 맛있어졌다. 공짜로 내주는 후한인심의 비지를 집어 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청남대-호젓한 가을 빛을 담다
상당산성과 인사하고 청남대로 가는 길가엔 샛노란 은행나무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소재한 청남대는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뜻으로 1983년부터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일찍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는 인근 현암사에서 청남대쪽을 가리키며 ‘천년 뒤 물이 차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듯 국토의 중심이요 성지가 이룩돼 국왕이 머물 지형’이라고 예언했다한다. 청남대가 위치한 지형을 하늘에서 보면 ‘王’자 글씨가 보이는데 호수로 뿌리내린 능선이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이리다. 국화 축제로 국화 향기 넘쳐나는 청남대의 가장자리엔 에워싸듯 역대 대통령 길들이 있다. 대통령길 호반 산책로에서 만나는 생명력 강한 향나무와 섬잣나무는 의젓하고 살며시 인사하는 함초롬한 흰진교와 구절초가 반갑다. 숯불처럼 빨갛게 달아 오늘 단풍나무와 너나할 거 없이 가을의 막바지를 불태우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고즈넉한 호숫가를 걷고 있노라면, 마음에 뿌리내린 목련 꽃잎들이 하얗게 날린다. 아린 기억마저 흩뿌려진 꽃잎에 덮어질 듯하다. 최고의 휴식처로 산림욕을 만끽할 수 있는 무궁화 모양의 오각정과 야생화 단지가 지천인 초가정을 지나, 너그러운 발걸음이 허락 할 때까지 하염없이 걷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청남대 가운데로 들어서면, 청남대를 개방해 준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돌탑이 보이고, 중앙 역사 문화관과 본관에 지난 대통령의 향취가 녹아난 물품들과 건물들이, 화려함보다는 고풍스런 정갈함으로 손님을 맞는다. 어울림 마당 옆 기지개를 켜는 쭉쭉 뻗은 메타세콰이어 길 주변에 수생식물들과 관목류는 도란도란 정겹고, 가을 햇살 반주에 맞춰 율동하는 양어장의 음악분수는 여행의 아름다운 울림을 준다.
대청호반로를 따라 20여분쯤 달리면 문의 문화재단지가 나온다. 문의 문화재단지는 문의 지역의 사라져가는 옛 문화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으로 선사유적인 고인돌을 비롯해 원형 그대로 옮겨 놓은 실재 전통가옥이 있다. 양반가옥과, 토담집, 대장간, 성곽을 재현해 찬찬히 들여다보면 선조의 지혜롭고 오롯한 기운이 전해진다.
넌짓넌짓 거닐다보면 주막집 쪽마루에 볏짚 꼬기가 무르익어가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대청호반 풍경은 가을 하늘 맘껏 뛰놀던 투명한 볕들도 숨죽일 듯 고요하고 새뜻하다.
문화재단지를 뒤로하고 마지막 여정지인 로하스 해피로드로 향한다. 구불구불 대청호호반을 달리다 보면 200리 로하스길이 나타난다. 로하스라 함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 사회 환경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적 웰빙이란 뜻이다. 대청댐을 기준으로 대청호 누리길과 온가족 소풍지로 제격인 널찍한 잔디밭, 깔끔하게 다져진 목재 데크 보행로, 자전거길, 생태환경을 만끽할 수 있는 생태공원은 오늘 이들의 쉼터요 200리 로하스길에 자그마한 보석들이다. 호반을 촘촘히 지키는 수변 식물들과 호수 물에 잠긴 신비한 매력을 뿜는 버드나무들의 반영은 맑다 못해 설레이기까지 하다. 세월의 무게에 몽당연필이 되어 버린 마음이 자라고 치유되는 여행, 해질녁 여행의 끝자락에 아스피린 같은 바람이 분다.
(글.사진: 이혜나. 연대 여행작가. http://cafe.naver.com./ys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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