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에서의 첫 아침은 상쾌한 하루를 열어주었다. 눈을 떠보니 지난 밤과는 달리 사람들이 휴게소에 몰려 있어 씻으러 가기 조금 부끄러웠다는 것만 빼면 그랬다. 유럽도 여름이라 다들 어딘가로 휴가를 떠나는지 온통 차들로 가득했다. 준비 시간을 줄이기 위해 꼴에 남자라고 여자들은 캠핑카에서 씻게 하고 우린 화장실로 가서 씻었다. 이럴 땐 알고 보면 부끄러움 무지 많이 타는 나도 여자이고 싶었다. 

덴마크 입성을 앞두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장보기였다.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익히 들었기에 국경을 넘기 전에 독일에서 몇 가지 물품을 사기로 했다. 그리하여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들르게 된 도시는 독일 최북단에 있는 플렌스부르크였다. 북유럽 국가의 도시는 아니지만 첫 여행지나 다름없었던 플렌스부르크는 북유럽을 향하던 우리의 설렘을 더욱 고조시
켜주었다. 한때 덴마크에 속했던 영향인지 거리 곳곳에 덴마크 국기가 걸려 있었던 것도 한몫 했다. 대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소박한 도시 풍경이 어쩜 그리도 정겨웠는지 모른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방인에게도 늘 따뜻하게 대해주는 현지인들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서 사오지 못한 음식 재료를 사려고 헤매다 비닐봉지 가득 뭔가를 들고 오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어디서 사신 거냐고 여쭸더니 활짝 웃으시며 시장을 가르쳐주셨다. 가격도 싸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많으니 얼른 가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아주머니 덕분에 찾은 플렌스부르크의 시장은 우리에겐 보물섬과도 같은 장소였다. 양파, 당근, 감자를 비롯한 채소부터 체리, 딸기, 자두 등의 과일까지 한데 모여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직접 기른 과일로 만든 잼과 역시 정성 들여 키운 꽃들까지 더해진 이곳은 시장이라기보다는 과수원이나 화원인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어느 나라를 가나 시장에는 항상 활기와 사람 냄새가 가득하다. 시장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미란 종종 흥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난 흥정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는데, 유럽의 시장을 처음 본 일행들은 그저 신이 나서 난리가 났더라. 말도 잘 안 통하지만 손짓과 발짓을 해가며 필요한 과일과 채소들을 사기에 여념이 없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다들 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아 덩달아 즐거워졌다. 이런 기분은 아마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는 느끼기 힘들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그들로 인해 내가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다.

플렌스부르크는 비록 여행 책자에 나오는 도시도 아니고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도시는 더더욱 아니지만, 화창한 하늘과 눈부시게 비치던 햇살을 안은 그곳에는 우리가 평소 잘 모르고 살았던 일상의 여유가 있었다. 관광객들로 가득한 명소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소도시 여행의 감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렌스부르크는 북유럽 여행을 앞둔 우리에게 훌륭한 애피타이저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