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essence)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용어이지만 기실 그 개념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 학자들은 본질의 2가지 의미에 주목한 바 있다. 본질이 지닌 의미 중 하나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만드는 것”이다. 즉, 본질이란 우선적으로 ‘종적 규정성의 원리’로, 하나의 종을 다른 종과 구별하는 원리뿐만 아니라 그 종에 속하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하는 모든 필연적 규정성들을 포함한다.
규정성의 원리 외에 본질이 지닌 또 하나의 의미는 ‘작용의 원리’이다. 예컨대 한 존재자를 '고양이'라는 종에 속하게 하는 원리는 동시에 그 존재자가 특정방식으로 (고양이처럼) 작용 또는 행하도록 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본질 혹은 본성은 동시에 작용방식을 규정하는 원리다. 결론적으로 한 존재는 존재하기 시작할 때 이미 그것의 본질에 의해 특정 종에 속하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모든 규정성을 두루 구비했다는 의미에서 종적 완결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본질에 따르는 작용을 수행함으로써 보다 완성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제이해교육(EIU, 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은 ‘평화와 인권, 국제이해’라는 유네스코의 본질을 가장 잘 반영한 사업 중 하나로 꼽힌다. 태생적으로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에 기반한 국제이해교육은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유네스코의 존재적 의미에 대한 중요성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는 데 있어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더불어 이러한 국제이해교육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핵심 도구로서 유네스코는 학교 네트워크를 활용했으며, 이에 따라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ASPnet, UNESCO Associated Schools Project Network)는 국제이해교육의 귀중한 산실이 되었다. 국제이해교육: 유네스코의 본질을 담은 교육
유네스코는 ‘세계 평화와 국제 협력’이라는 목표를 교육, 과학, 문화, 정보커뮤니케이션 분야를 통해 달성하고자 2차 대전 직후 설립되었다. 「유네스코 헌장」 서문에 명시된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라는 문구는 유네스코의 존재적 이유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국제이해교육은 인간의 존엄, 평등, 상호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가르침으로써, 인류가 상호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 정의와 자유, 평화를 달성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년)의 제26조에 명시된 교육권, ‘국제이해교육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국제이해, 협력, 평화를 위한 교육과 인권, 기본적 자유에 관련된 교육 권고」(The Recommendation concerning 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 Cooperation and Peace and Education Relating to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1974년)도 국제이해교육을 위한 강력한 법적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1974년 「국제이해교육 권고」에서는 ‘국제이해교육’을 단순히 국제적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국제 이해와 협력, 국제 평화와 인권, 기본적 자유를 함양하기 위한 교육으로 정의한다. 이는 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협력을 강화하는 제반 교육적 활동뿐만 아니라 평화교육, 인권교육 등을 모두 포함한 총체적 교육 활동을 말한다.
국제이해교육은 국제 정치적 역학 구조와 이해관계의 영향 하에서 여러 변화를 겪으면서 추진되어왔다. 서구권이 유네스코 사업을 주도했던 시기에 국제이해교육은 유네스코의 중심 사업으로 부각되었다. 초기에는 ‘세계시민교육’(1950년), ‘세계 공동체에서 살아가기 위한 교육’(1952년) 등으로 불리다가, 1954년 ‘국제이해와 국제협력 교육’이라는 용어가 자리 잡았다. 1950년대에 국제이해교육은 문해교육과 함께 유네스코 교육 사업의 양대 축을 이루었지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교육-발전 간 연계성이 강조됨에 따라 국제이해교육에 할당되는 자원이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1970년대는 국제사회에서 수적으로 절대 우위를 차지하게 된 제3세계 그룹이 기존 세계질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결집한 시기였다. 그 일환으로 1974년 제6차 유엔 특별총회에서 「신국제경제질서 수립 선언」이 채택되었고, 같은 해 열린 제1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국제이해교육 권고」 또한 서구 중심으로 관념적 수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기존의 국제이해교육을 제3세계의 시각과 실천적 내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네스코를 정치화 한다’는 서구 국가들의 비판으로 선진국-개발도상국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는 국제이해교육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세계화의 심화와 무한 경쟁체제로의 진입, 국제분쟁의 증가 등 1990년대의 범세계적 상황은 국제이해교육이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여했다. 1992년 ‘평화의 문화 사업’(Culture of Peace)과 더불어, 구소련 및 동구권 국가의 시장경제체제 편입과정에서 새롭게 요구되는 민주주의 및 인권 교육 사업이 추진되었다. 199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 교육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고, 199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44차 유네스코 국제교육회의에서 ‘평화, 인권, 민주주의 교육에 관한 선언’ 및 통합적 활동계획을 채택했다. 또한 1996년 유네스코가 발간한 『21세기 세계교육위원회 보고서』(International Commission on Education for the Twenty-first Century)에서도 교육의 4가지 기둥 가운데 하나로 ‘함께 사는 교육’을 제시함으로써, 급속한 세계화 과정에 따른 문화 정체성 위기 및 문화·종교 간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데 있어 교육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부터는 국제이해교육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 2000년에 유엔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달성하고자 채택한 유엔 ‘새천년개발목표’(MDG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에 국제이해교육 관련 내용은 빠져있었으며, 구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 경쟁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이 마무리됨에 따라 이들 국가를 중점 대상으로 한 인권, 평화, 민주주의 교육도 국제사회의 우선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지속가능발전교육(ESD,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세계시민교육(GCE, Global Citizenship Education) 등 새로운 유네스코 교육 사업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국제이해교육에 대한 초점이 이들에게 옮겨지게 되었다.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 학교에서 움트는 세계 평화
유네스코는 1946년 창설 초기부터 교과서를 심층 분석하는 프로젝트와 국제이해교육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2차 대전 이후, 유네스코가 주축이 되어 독일과 프랑스,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지리 교과서 개편을 적극 시도했다. 이와 연계해 국제이해교육이 시작되었고, 1953년 국제이해교육을 실천할 시범학교로서 유네스코학교를 출범시켰다. 15개국 33개 중등학교에서 시작된 유네스코학교 사업은 현재까지 전 세계 10,000여 개 학교와 함께 추진되고 있으며, 10년 단위로 국제 기념회의를 개최한다(2013년에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수원에서 60주년 기념 국제회의가 열렸으며, 필자가 행사를 담당했었다).
냉전시대인 1960년대까지 국제이해교육의 주된 형태는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교육이었으며, 이에 따라 당시 유네스코학교에서는 다른 나라 우표 수집, 다른 나라 민속 공연, 다른 나라 전통 의상 소개 등의 활동이 주로 이루어졌다. 1963년 프랑스 세브르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국제회의에서는 국제이해교육이 다루어야 할 3개 주제로서 ‘세계 문제와 유엔의 역할, 타국과 타국의 문화, 인권’을 결정하기도 했다. 유네스코학교가 특히 회원국들로부터 좋은 인식과 지지를 받았던 시기는 1964-1973년으로, 국가들의 경제 성장 및 빈곤 증대가 심화되고 1972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 인간환경회의의 영향으로 환경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또한 1965년부터는 중등학교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도 유네스코학교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세계교육위원회 보고서』가 발간된 1990년대 중반에는 최초로 유네스코 주관으로 다른 나라의 유네스코학교 학생들 간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발트 해 주변국들이 최초로 지역 시범 사업을 제기했다. 또한 남(가난한 나라)과 북(부유한 나라)의 학교 자매결연이 이루어졌는데, 50여 개국에서 200여 개의 학교가 자매결연에 참여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로 접어드는 1994-2003년에 유네스코학교 사업은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그 조직을 강화했으며, 1995년 ‘세계 관용의 해’(International Year of Tolerance)를 계기로 유네스코학교가 평화를 실현하는 교육을 하는 데 관용의 요소를 도입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국제이해교육이 약화되면서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 사업 또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는 현재까지도 존립하고는 있지만 2003년 창립 50주년을 기점으로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 성격 또한 바뀌었다.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 사업 관련 프로그램이나 예산이 유네스코의 우선 순위에서 크게 밀렸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사무국 내 조직에서도 과거에 비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모두를 위한 교육’(EFA, Education for All), 지속가능발전교육 등 유네스코의 새로운 교육 분야 역점 사업들이 국제이해교육의 내용을 상당 부분 흡수하면서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도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네트워크 본연의 취지가 약화되고 그 고유한 성격 또한 상당히 바뀌게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 가입 학교에서는 1) 유엔의 우선과제(UN priorities), 2) 지속가능발전교육, 3) 평화와 인권(Peace and human rights), 4) 문화 간 학습(Intercultural learning)이라는 4가지 핵심주제 중에서 하나 이상을 선택해 다양한 관련 학습 및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학교 실정에 따라 동아리, 학급, 학년, 교과, 학교 전체 등 다양한 단위에서 학습과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다.
국제이해교육의 미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제이해교육은 유네스코의 기본적 가치와 이념을 매우 적확하게 반영한 교육 사업으로서, 유네스코 활동사에 있어서 그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를 위한 요긴한 도구로서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급변하는 범세계적 상황 속에서 국제이해교육과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는 존재적 가치가 다소 퇴색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시점에서 국제이해교육이 왜 필요한지,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국제사회 차원의 논의와 인식 재고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 회원국들의 정책에 유네스코 학교 관련 내용이 거의 반영되지 않아 국가적 차원에서 제대로 활동이 실시되지 않고, 일부 유네스코학교에 참가한 학교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 ‘자기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유네스코학교네트워크가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거듭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참고자료]
- 이경재, 『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살림, 2003) - <유네스코뉴스> 제637호. “톺아보는 유네스코 역사 12장면 6 – 국제이해교육, 함께하는 삶을 배우다”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평화를 품은 학교, 세계로 열린 교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2014) - 한국국제이해교육학회, 『모두를 위한 국제이해교육』 (살림터, 20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