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그 이후에는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 의사당의 재건축을 약속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사람(건축가)의 발상을 통해 건물이 설계되고 만들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말이다. 건축과 인간의 유기적 영향관계를 잘 보여주는 명언이다.

필자는 2010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잠시 근무했었다. 출근 첫날, 사진으로만 보던 유네스코 본부 건물이 눈앞에 펼쳐질 때의 벅찬 마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중후하고 위엄 있는 노신사와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업무를 시작하고 처음 2-3일 간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건물 안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유네스코 본부 건물은 파리 7구에 있는 본관 퐁뜨누아(Fontenoy) 건물과 함께, 1구에 위치한 미올리스(Miollis)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Y자 모양의 디자인 때문에 ‘삼별(three-pointed star)’이라는 별칭을 가진 퐁뜨누아 건물은 당대의 유명 건축가인 M. 브뢰어(미국), P. L. 네르비(이탈리아), B. 제르퓌스(프랑스)가 공동으로 디자인해 1958년에 완공했다. 프랑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지어진 이 건물은 ‘유네스코’라는 유명 국제기구의 본산이라는 점 외에도, 근대 건축학의 이정표로서 그 질적 우수성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퐁뜨누아 건물의 가치는 건물에 소장된 방대한 양의 문화재와 현대 예술작품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은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센터처럼 그 자체가 미술관이자 박물관이다. 퐁뜨누아 건물의 건축계획을 승인한 직후, 유네스코는 당시 유명 예술가들에게 향후 이 건물을 채울 예술작품들에 대한 제작을 의뢰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가치인 ‘세계평화’를 환기시키고자 만들어졌다. 담당 건축가인 브뢰어, 네르비, 제르퓌스는 이 건물을 설계할 당시부터 이들 예술품들이 제대로 수용될 수 있도록 벽면의 크기나 공간의 동선을 고려했다.

현재 유네스코 본부가 소장하고 있는 예술품들은 700여 점에 이른다. 피카소와 미로의 회화, 자코메티와 칼더의 조각을 비롯해 각 회원국들이 기증한 고고 문화재가 건물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자코메티의 작품처럼 유네스코가 직접 구입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증품이다). 한국의 경우 현재 유산 컬렉션 5점, 일반 컬렉션 3점이 유네스코에 소장되어 있다. 유산 컬렉션은 김기창, 박광진, 민경갑, 강익중 화백의 그림 4점과 고려청자 1점이다.

유네스코 본부 건물은 각기 다른 개성과 국적을 지닌 건축가들의 합작품으로,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창의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교육, 과학과 더불어 문화를 전담하는 유엔 전문기구로서, 현 유엔 관련 기구들 중 가장 많은 문화예술 분야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유네스코 본부는 이들 예술작품을 통해 세계평화와 문화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가 지닌 태생적 배경과 역사는 유네스코의 존재적 가치와 의미,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범세계적 임무를 양산해왔다. 건물을 만든 건 우리이지만, 반세기가 넘은 지금 국제사회에 필요한 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건물이다.

[참고자료]

- <유네스코뉴스> 제685호. “주재관 서신 – 유네스코, 숨겨진 보물을 꺼내다”

- <유네스코뉴스> 제699호. “주재관 서신 – 재정 위기 속 유네스코 본부의 ‘건물 딜레마’”

- 유네스코 본부 홈페이지(unesc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