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피부색이 이곳의 전형적인 무슬림들처럼 새까만 어느 한국인 남성은 어느 남자분의 여권 사진은 내 사진보다 더 하앴다.ㅎ 5년 이상을 이 곳에 살면서 골프를 거의 매일 치다시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단다. 참고로, 말레이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게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나라 중 하나다.

핫, 핫, 핫, 오운리 핫. 말레이시아의 날씨는 딱 두 가지다. 햇볕이 쨍쨍하면서 덥거나 비오면서 덥거나.

이래도 덥고 저래도 덥다.

쿠알라 룸푸르에 온 지, 1년도 채 안 됐는데 얼굴에 기미가 늘었다. 물론 팔다리도 많이 탔다. 1년 내내 더운 나라다 보니 주로 반팔에, 반바지나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주로 입게 된다. 그렇게 약 8개월을 살다 보니, 팔과 다리에 선이 생겼다. 팔은 2단, 다리는 3단.

반팔 윗쪽으로는 살색, 아랫쪽으로는 갈색. 무릎 아랫쪽으로는 짙은 갈색, 무릎에서 허벅지까지는 갈색, 허벅지 윗쪽으로는 살색.

나는 여행이나 긴 외출에도 귀찮아서 썬크림을 잘 안 바를 뿐더러 얼굴도 늘 간단한 화장으로 끝낸다. 스킨, 에센스, 크림, 영양 크림 따위는 없다. 오직 로션과 기본적인 화장용 재료들만 있을 뿐이다.

썬글라스를 끼거나 모자를 쓰면 얼굴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썬글라스가 커버하지 못하는 눈 주위에 기미가 부쩍 늘어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썬크림을 빌려서 바를 수 있을 때는 바르고, 우산 겸 양산을 꼭 들고 다닌다. 산골 오지 출신인 내 자존심상 직접 사서 바를 수는 없다. 그것도 비싼 썬크림으로만.

그럼에도, 시나브로 나는 피부를 위해 온갖 호들갑을 떠는 여자들처럼 돼 버린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며칠 전에는 햇볕이 좀 사위어 갈 즈음인 이른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가 일사병 증상이 있었던 적도 있다. 산책 갔던 곳이 나무가 드물게 있는 곳이다보니, 아스팔트 위로 땅의 열기가 꽤 후끈거리며 올라온다 싶더니, 저녁을 먹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밥을 거의 다 먹어 갈 즈음에는 속이 울렁거렸다. 함께 있던 분께 증상을 말씀드렸더니, 일사병 같다고 했다. 좀 쉬면 괜찮아질거란다. 남 얘기인 줄 알았던 일사병이라니. 하루 종일 땡볕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겨우 30분 정도를 천천히 걸어다닌 것 밖에 없는데! 이런 날씨에 이보다 더 오래 산책해도 지금껏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날 저녁 식사 후, 푹 쉬고 나니 괜찮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몸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말레이시아에 왔을 때, 적응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한없이 느린 것. 절대 일을 서두르지 않음. 이 사람들, 우리나라로치면 분식집만한 작은 식당에 직원을 세 명이나 쓴다. 

내가 가 본 말레이시아식 "레스토란", 즉 마막집에서는 심지어 다른 손님의 음식이 우리 테이블에 배달되기도 하고 주문한 음식과 다른 음식이 나온 적도 몇 번이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컷 주문을 받아 놓고 나중에 다시 와서 뭘 시켰는지 묻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문받는 태도 또한 인사 따윈 없다. 웃기 싫은데 억지로 손님에게 미소짓지 않는다.ㅎ 그럼에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은 없다. 아직 이에 적응이 안 됐을 때는 직원이 많은데도 저러면 한국에선 당장 잘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개월 지내보고 나서야 더운 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이 사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말레이시아 서민들이 주로 가는 마막에는 대개 에어컨조차 없다. 천장에 설치돼 있는 커다란 "실링 팬" 과 선풍기가 전부다. 대신 직원들은 대개 남자들이고 인원수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들은 한없이 느리고, 미적대며, 대충이다. 한국인들이 보면 딱 군기가 빠져있다고 할만큼 한심해 보일 수도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런 것도 한국이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런 곳에서 한국의 알바처럼 "쎄빠지게" 뛰어다니다가는 아무리 혈기왕성한 남자라 하더라도 그 더위에는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식 효율이 사람이 하는 일을 가능한 많이 기계로 대체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라면, 말레이시아식 효율이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웬만하면 사람이 다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요즘은 조금씩 바뀌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문득, 말레이시아의 마막집 주인들은 에어컨이라는 기계 대신 '사람'을 선택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행동이 빠릿빠릿한 직원 하나에 이왕이면 시원한 곳에서 밥을 먹으면 더 좋을 것이다. 대신 세 명의 직원 가운데 두 명은 실업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막집에 오는 손님들은 덥고 시끄러운 공간과 느려터지고 실수투성이인 직원에 대해 누구도 딴죽을 걸지 않는다. 손님들 또한 이 모든 것에 적응한 것일까.

우리는 견디기 힘든 어떤 상황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싸우거나 적응하거나 적응하면서 싸우거나.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살다보니 내 뜻과는 무관하게 이런 일들이 생각보다 자주 생기곤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나름의 원칙을 세워 놓았다. 

첫째, 나의 노력이나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더 나은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싸울 수 있는 한 싸우기.

둘째, 더위와 추위, 그 밖의 자연 현상들처럼 신이 창조한 것들에 대해서는 적응하려고 노력하기. 적응이 힘든다면 좀 더 적응이 쉬운 쪽으로 가기.

셋째,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순리이면서 나의 책임이 가장 큰 문제임에도 노력이 부족한 결과로 생긴 것에 대해서는 싸우면서 적응하기. 

이를 테면, 병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같은 것들.

사람들은 흔히 '투병 생활'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이 말의 뜻은 병과 싸워서 이기면 회복한다는 뜻이고, 싸워서 지면 결국 죽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엔 죽음과 싸울 텐가? 아닌 게 아니라 삶과 젊음만이 최고라 믿는, 하늘을 찌르는 인간의 욕심은 벌써 늙음이나 죽음과의 전쟁을 선포한지 오래됐다. 더 젊어지고, 더 젊어 보이고, 삶을 더 연장지키고, 죽음을 거부하려는 인간들의 저 처절한 발버둥들을 보라. 화장품 가게, 피부관리실, 미용실, 성형수술전문 병원들을.

인터넷과 신문, TV에 넘쳐나는 젊음 유지시켜 주거나 되돌려 준다는 온갖 광고들을. 그리고 과학과 의학을 비롯한 온갖 노력들을.

어쨌거나 병이나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임과 동시에 인간의 노력으로 더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대해서는 싸우는 한 편으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 또한 받아 들여야 하지 않을까?

내 생애 처음으로 가을과 겨울이 없는 한 해를 살아보면서 새삼 내가 싸워야 할 것들과 내가 적응해야할 것들, 그리고 내가 적응하면서 싸워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